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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Cinema

너의 이름은,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

by 라이터스하이 2017. 8. 2.



이 영화는 한일 양국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평점도 꽤 높고, 덕후들을 성리순례 하게금 했다. 호평이 그만큼 지배적이지만, 혹평들도 꽤 있다. '안 봐도 비디오 겠지. 흔한 작품성 논란이겠지?' 싶었던 내 예상에는 반전이 있었다. 무거운 논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불편했다고 적은 어떤 글의 중간 중간에는 오타쿠라는 단어도 보였고, 페미니즘이라는 키워드도 보였다. 화두가 된 쟁점은 바로 이 <너의 이름은> 이란 영화 속에 여성 혐오라 생각되는 장면들이 보였다는 것.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크게 아래의 3포인트로 요약된다.










- 자전거를 타고가는 뒷 모습에서 팬티가 보인다. (필요없는 장면이다.)

- 농구를 하는 장면에서 가슴이 출렁거린다 (과도하게)

- 위에서 아래로 자기 가슴을 내려보는 장면이 있다(노골적으로)






필자도 가슴을 아래로 내려보는 장면에서는 왜 이 장면을 넣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감독들이 의도적으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를 가미한다고는 하지만, 맥을 끊기 위한 장치가 아님에는 분명해 보인다. 가령 그렇다해도 여성 혐오나 성상품화를 느낄만큼은 아니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2016년 미국 여성영화 비평가 협회상에 노미네이트 된 바 있다. 그 이유는 "남성과 여성이 바뀌었음에도 사회가 그것을 박해하기는 커녕 그것이 더 일관적으로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뛰어나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정받은 영화를 보면서도 일각에서는 '그 정도는 아닌데 왜?'라는 시선이 있는지. 그리고 그럴만 했다라는 의견에는 어떤 간극이 있는 것일까? 나름의 생각으로 3가지 이유를 들어봤다.






전형적인 듯, 전형적이지 않은 변주


누군가는 <너의 이름을>을 전형적 로맨스물에 빗댄다. 거기에 천재지변을 한 스푼 가미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눈높이가 높은 대중들의 이유가 그렇게 단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제이슨 스타뎀의 돌아온 미친 액션', '시간을 넘나드는 퓨전 사극 로맨스' 류와 같은 수식어로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구성도 구성이고 복선도 복선이지만, 주제 의식을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너의 이름은 이라고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너의 이름은 해석이라는 단어가 보이는 게다. 시작 부분에는 러브스토리 같다가, 중반부부터는 사극같기도 하다가 후반부에는 힐링드라마 같다. 






관객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로맨스물을 보고 싶은데 좀처럼 쉽지 않다. 시간에 대한 흐름도 놓지 않아야 하고, 스토리의 개연성 퍼즐도 맞춰야 하고, 그리 친절하지 않은 극중 관계(아버지와의 서먹함 등)도 짜 맞춰야 한다. 

그러니까 보통 로맨스와 다르게 머리도 써야 하고 가슴도 써야 하는 것이다. 늘 봐도언 로맨스와 달리 전형적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뇌 칼로리가 꽤 소모되는 영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뭘 어쨌어? 몰개연성 몇 장면


개연성이 없다라는 수식어로 대표되는 장면이 아버지와의 관계다. (원작에서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표현되었다고.) 아버지랑 별로 안 친하구나.. 정도의 암시만 줄 뿐, 미츠하와 아버지는 별 다른 감정선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그러다 후반부에 갑자기 아버지가 도와줘서 마을 재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몰개연성이라해도 쉽게 반박하기 어렵다. 

그 외에도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장면들은 꽤 보인다.




로맨스물의 흔한 감정이입 = 이성간의 만남 + 사건, 갈등 + 누적된 시간


전형적 로맨스물에서 감정선을 이끌어가는 감정이입의 공식이다. 감정이 이입되려면 두 사람이 일단 만나야 하고, 만났으면 갈등을 겪어야 하고, 그런 시간들이 쌓여야 한다. 그런데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의 몸을 취하게 될 뿐이다. 또는 메모를 통해 소통을 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반응을 듣게 될 뿐이다. 

간접적인 감정교류를 통해 어떻게 그런 큰 사랑이 생겼냐는 질문이 생긴다. 손만 잡아도 애를 낳을 수 있다는 소리를 더는 믿지 못하는 순수함 결핍인지, 영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영화 박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원하지 못한 결말


글 중간에 이야기 했던 뇌 칼로리와 연관될 수 있는 부분이다. 초반, 중반, 후반. 크게 세가지 장으로 나눌 수 있는 영화의 네 번째 장이 바로 결말이다. 그 결말은 해피엔딩이지만 각자가 상상하게끔 만들었다. 좋게 표현하자면 너무 섬세한 영화고, 나쁘게 말하자면 정말 손(뇌)이 많이 가는 영화다.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를 보면서도 시간적 흐름이나 숨겨진 스토리에 대한 끈을 놓지 않기 위해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간단한 타임슬립물이 아니라 꿈까지 결합해 더 복잡하다. 단순히 감성적이기보단 이성적 소화도 동반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사건의 흐름과 원인에 더 집중하다보면 '어 두 사람이 왜 사랑하게 된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 비극과 희망을 오고가는 로맨스물에 전통, 종교, 사상 등을 오고가는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봐오던 눈물 찔끔 대놓고 짜게 만드는 영화들과는 거리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을 나는 해피 오픈엔딩이라 표현하고 싶다.





나름대로 이 영화가 불편하겠다 싶은 이유에 대해서 적었다. 가끔 김기덕 영화를 보면서 여성에 대해 가학적인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다만 그런 감정이 영화 기승전결이나 대세에 영향을 줄만큼의 불편함은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 감독이 말하려는 건 가슴 몇 번 더 보여주고 팬티 올리는 시각적 네러티브는 아닐테니까. 영화 후반부만큼이나 글이 무거워 진 걸보니 결말을 지어야겠다. 어쨌든 불편함 때문에 놓치기엔 아까운 영화다. 좀 더 순수한 척 하면 편안해질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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