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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Cinema

천만돌파 '변호인'의 카운터는 '노무현'이 아니었다

by 라이터스하이 2014. 2. 27.



정치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영화, 노무현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이 많았던 상업영화 변호인. 어쨌거나 변호인은 작금의 오락영화 주류 속에서 1,000만 명이란 기록을 넘어섰다. 포화같은 홍보를 뿌린 게 아님에도 변호인은 떠올랐다. 그 성공의 이유 대체 뭘까? SNS를 빼놓고 이야기하면 섭섭하다. 오늘날의 입소문은 곧 SNS라 봐도 된다. 한 명 한 명 모인 트윗들은 관객들을 사탕으로 엮어 곧 극장으로 부르고 말았다.


하지만 양날의 검, 빠르게 닳아오르고 다시 두배의 속도로 빠르게 식는 SNS의 한계이자 특성, 생각보다 항상 짧다. 특히 영화나 미디어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포장을 뜯어봤는데 생각보다 내용물이 없었던 영화라면? 곧 SNS에서도 씹혀져 뜯겨나간다. 그 속엔 컨텐츠라는 회자거리가 있어야 한다.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변호인의 흥행 속엔 변수라 할 수 있는 역할들이 많아 보였다. 정치에는 관심없지만 우리가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의 과거 이야기를 재구성한 이야기라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사람의 사연을 한 번쯤 귀기울여 들어보고 싶은 미련이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변호인의 저력은 2014년 한국영화판의 트렌드화 속에서도 꽃핀 흥미로운 영화다. 재미로 천 만 관객을 넘기기가 요즘 정말 힘들다. 필자가 생각하는 변호인의 흥행 이유는? 조금 다른 시각인 것 같아 몇자 적어본다. 변호인의 천만 돌파는 노무현 그 자체 브랜드만으로 거둔 성과라기엔 너무 과분하다. 결국 지금을 살고있는 우리의 압박감에서 왔다고 믿는다. 노무현의 단편적 자서적이기 전에 이 영화의 배경이 되고있는 부림사건. 국민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공권력 주연의 자작 뮤지컬.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에 공감하는 자발적인 참여라 보여진다.


설득력있는 적당한 팩트들로 공권력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던 영화들, 부당거래 그리고 모비딕. 이런 류의 영화들이 압박받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 충분히 고생의 댓가를 보상받는 세대가 왔다. 국가를 향하고 있던 곪은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있고 각광받는 요즘의 현실이다. 변호인 역시 그런 고마움에 너나 할 것 없이 서둘러 티켓파워에 그 한몸을 실었던 건 아닐까? 결국 노무현이라는 존재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다. '기울어진 언론'이나 '정부에 대한 끈임없는 불신', 이런 현실 속에서 대중들이 느끼는 압박감에 대한 공감, 그 도화선을 제대로 건드렸던 것이다. 




최후의 카운터 한방


이 영화의 진정한 카운터 한 방은 중반 이후부터다. 일본원정 국가대표 경기같은 분위기 속에 송우석은 단신의 힘으로 공권력과 싸움에 들어섰다. 송강호의 극에 달한 연기와 눈빛 하나하나를 모두 잡아준 줌업 앵글의 궁합은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엄청난 몰입과 감정이입을 선사했다. 단언컨데 변호인 최고의 장면이었다. '빈부격차는 명함도 못내밀 국가와 국민의 갭'을 그렇게 공포스럽게 만들어 낼수도 있었던 것에 섬짓했다.


이렇게 필살기 한방을 제대로 날릴 수 있었던 배경은 역시 스토리텔링 사이의 메세지였다. 오래전 잃어버렸던 송우석의 열정, 그 따듯함은 그를 끝까지 견디게 만든다. 모든 걸 버리고 자아를 찾아 가슴이 시키는대로 살기 시작한 송우석. 그를 보는 내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노무현을 회상하게도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 모습이 더 비춰졌던 건 아닐까? 30대부터 50대까지 겪는 공통적 아픔을 대신 표현해 준 변호인의 한방이었다.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명언을 떠오르게 만든 변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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